☜♡주님의 향기♡☞/,,,†,주님 삶 이야기

오늘도 주님의 손을 잡고 계십니까?

ㅅrl벽 2013. 4. 1. 21:31

오늘도 주님의 손을 잡고 계십니까?

마태복음 14:22~33, 마가복음 6:45~52, 요한복음 6:15~21 세 군데에서 물 위로 걸으신 사건이 등장한다. 믿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희귀한 기적을 보이기 위해서 일까? 아니면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존재성을 알리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오병이어의 사건에 대한 반증을 보이기 위함이었을까?

 

여러 가지 추측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이 부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을 접하는 이들마다 도저히 지상에서 생길 수 없는 사건과 기적으로 치부해버려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하나의 사건과 기적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병이어를 먹었던 군중들에게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는 과정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불합리적인 속성인 혼돈과 공허와 무지로 무질서한 것을 소멸시켜 주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익히고 적용하며 실천해가는 모범을 보여주시는 것이었다.

 

제자들과 무리들에게로부터 거리를 두고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시는 것이 산기도의 모델로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다. 여기서 산이란 의미는 우리 육안으로 보이는 산도 의미하지만 산이라고 하는 본질과 개념에 따르면 “하나님의 속”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과 만남을 추구하는 장소보다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산에 가야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산이라는 의미를 두고 있다. 거기서 기도한 것이 내가 이것을 이렇게 해달라는 식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사역을 감당하겠다는 주님만의 충성을 다짐하는 기도의 시간이다.

 

24절에 고난을 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말씀을 이루는 사람들에게는 말씀을 지켜나가는 그 자체가 고난인 것이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고난이라고 하면 세상에서 겪는 고초를 고난으로 착각하고 있다.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당하는 고난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을 이 땅의 고난과 전혀 다른 고난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즉 말씀을 배우고 익히며 그 말씀대로 살고 지키며 실천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고통과 아픔을 반드시 수반하는 것이 전혀 아니며 고행을 하거나 은둔생활을 추구하는 것은 더 더욱 아님을 밝혀 둔다.

 

물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제자들 전부 다 유령으로 인식하고 만다. 이와 같이 많은 신앙인들은 아직도 주님을 유령으로 이해하고 신기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뼈와 살이 없는 유령의 존재가 아닌 뼈와 살이 분명히 있는 주님께서 내 안에 있다면 내 살과 뼈가 과연 누구의 것인가?

 

이런 설교나 강의를 하게 되면 이런 의식을 고려하지 않고 말씀을 읽고 대해 왔었기 때문에 주님이 내재하심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뼈와 살이 분명히 있음을 강조한 대목이 누가복음 24:39에 언급하고 있다. 말씀의 실천 중에 가장 중요한 실천이 바로 주님과 내가 한 몸이 되어 연합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살과 뼈가 나의 살과 뼈가 연합되어 누구의 것으로 변화되었는지 깨닫는 그 자체가 바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을 기본으로 삼지 않고 말씀을 지키는 것은 아직도 내 육적인 상태에서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죄송하지만 그것은 내가 열심히 행한 종교행위에 불과한 것이며 말씀 순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나면 그 어느 누구라도 주님을 유령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주님의 살과 뼈가 나의 살과 뼈가 하나로 연합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 하나로 이루어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아니 이것이 말씀을 지켜내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이며 아주 중요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유령으로 착각하는 제자들을 안심시키는 주님을 본 베드로는 주님처럼 물 위를 걷게 해달고 요청하였다. 주님의 명령을 받은 베드로는 즉시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 상태가 되었다. 원문에는 바람이 아닌 영(아헬 리토보아)으로 되어 있다.

 

어느 유머에 보니 예수께서 이 땅의 사역을 마친 후 하늘나라로 올라가니 천사들이 대대적인 환영만찬에서 천사가 “주님 지상에서 행하신 기적 중에 하나를 이곳에서 보여주심이 어떻겠습니까?” “그럼, 무엇을 행했으면 하느냐?” “지상에서 바다 위로 걸으신 기적을 보여주십시오.”라고 하여 물 위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발자국 걷더니 그만 물속에 가라앉기 시작해 천사들 모두 놀라 기겁을 하여 예수를 건져냈다. 왜 물 속에 가라앉았을까? 그 이유는 지상에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발에 못 자국으로 펑크(빵구)가 나서 가라앉았다는 낭설이 있다.

 

왜 베드로는 성령을 보고 무서워하며 물속에 빠져가는 것일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성령은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하며 신앙생활의 조력자로 아니면 놀라운 은총 속에 기적을 행하시는 존재만 여기고 있다. 성령은 육의 속성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들의 머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로 바꿔주기 위해 우리의 머리를 자르는 일을 감당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 속에 적용해 나가면 항상 두려움과 공포가 앞서게 되어 잘 안될 것만 같고 죽을 것 같은 불안감을 배제할 수 없다. 어떤 분들은 말씀을 순종하는데 무엇이 두렵고 불안해하는가? 하며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원래 무식하면 용감하게 되어 있는데 알고 나면 불안한 정도가 아니라 그 앞에 초죽음이 될 수밖에 없다.

 

에스겔 47:3~5의 내용이 바로 말씀을 순종에 따른 과정과 상태를 의미하며 육의 속성으로 인해 괴상망측한 머리를 자르고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로 바꾸는 작업의 과정을 언급하는 것이다. 홍해를 건너가거나 요단강을 건너가는 사건도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들어가는 과정 속에 육신으로 가득 찬 머리를 자르고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로 바꾸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례, 침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물 속으로 빠져가는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하며 손을 잡아 주신 것일까? 이 글을 쓰는 본인도 이런 내용을 위시하여 수많은 내용들이 과거에 알고 있던 내용이 아니라 전혀 다른 내용들이 발견될 때마다 의기소침해지며 자신감이 사라져 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교회학교에서 배웠을 때 부흥회나 각종 성경공부, 그리고 신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들이 드러날 때마다 “아니 이럴 수가”하며 의심해 왔었다. 말씀을 깊이 알면 알수록 두려움과 초조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내용들이 전개될 때마다 이때까지 알았던 내용들이 허구였단 말인가?

 

내가 받았던 구원의 확신을 무엇이며 순간순간마다 경험했던 사건들과 체험들은 과연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때까지 알았던 말씀의 내용들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것인가? 하며 의아해 온 것이 수없이 많았었다. 독자들 가운데 신앙생활 속에서 의기소침해지거나 구원의 확신이 소멸되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베드로도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물 위로 걸었다면 자신감이 있게 확고한 믿음 위에 걸어야만 했는데 점점 물속으로 빠져감에 따라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말씀을 적용하며 실천하는데 왜 의심하고 자심감이 사라지며 의기소침 하느냐? 이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생명)을 익힌 것이 무엇이냐? 하면서 베드로의 손을 잡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데 더욱 확고하게 자신 있게 실천하도록 붙잡아 주는 것이 구원해 주시는 상황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때까지 이 사건에서 베드로의 손을 잡아 주신 것은 단순히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를 살려주시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해 왔다.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없지만 그러나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는 데에 따른 확신과 자신감을 부여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내용과 의미였다는 것이다. 아마 독자들도 이 글을 읽기 전까지 상상할 수 없었으며 근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 위로 걷는 경험만 추구하지 말고 물속에 점점 빠져가면서 세례와 침례를 경험하라. 내 육신의 머리가 잘려나가며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로 바뀌는 체험을 해야 한다. 그런 고통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도 하지 말라. 그리고 주님께서 내게 향하여 내뻗은 손을 꼭 붙잡아 구원의 확신을 상실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제부터 고난이 무엇인지, 물 위로 걸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물속에 빠져가야만 하는 이유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안 죽으려고 물속에 허우적거리지 말고 물속에서 반드시 주님과 함께 죽어야만 한다. 그렇게 죽어도 주님의 손이 나를 붙잡고 있다면 그 죽음을 초월할 수 있지 않은가?

 

저승사자가 나를 데리러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와 동행하시려고 오셨다면 죽음도 마다하지 말라. 내게 닥쳐온 역경과 환난 가운데 주님의 손이 나를 붙들고 있다면 무엇이 나를 두렵게 할 수 있겠는가? (롬 8:35~39) 주님의 말씀을 준행하는데 있어 그 두려움마저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365회나 되는 것이 매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라고 여기는데 생활 속에 엄습해 오는 두려움을 갖지 말라는 말씀도 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데에 앞서 두려움을 갖지 말고 실천해 나가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주님의 손을 꽉 붙들고 나가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