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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억 기부하고 아내한테 3만원 빌려쓰는 남자

ㅅrl벽 2012. 11. 28. 18:48

 
      23억 기부하고 아내한테 3만원 빌려쓰는 남자 

▲ 좌측이 한 승무 교수
      [노컷뉴스] ‘테레사 효과’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봉사활동을 하거나 봉사하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인체의 면역기능이 높아지는 효과, 이걸 ‘테레사 효과’ 다 그러는데요.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서 테레사 효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오늘의 초대손님 경희대학교 한승무 교순데요. 한 교수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제자들을 위해서 매년 1억씩 정년 때까지 23억 원을 기부하겠다고 했습니다.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했던 그는 달걀 프라이 먹는 게 소원 이었고, 버스 탈 돈이 없어 이십리 길을 자전거로 통학해야 했습니다. 식당 서빙, 군밤 장수, 감귤 행상까지 하면서 그야말로 고학으로 대학교수가 됐는데요. ‘가난을 겪어봤기 때문에 가난한 학생들의 설움을 잘 안다’ 고 말하는 경희대 한승무 교수를 12월 5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남의 밭 서리로 배고픔 달랬던 가난한 어린 시절 ▶ 요즘 겨울날씨가 춥습니다. 한승무 교수님의 어릴 적 겨울 풍경은 어땠나요? 제가 흰 눈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에 겨울을 좋아합니다. 지금도 눈이 오면 아주 반갑죠. 제가 어릴 적의 겨울은 일단 너무 힘들고 추웠다는 생각이 많아서 겨울하면 겁이 나고 두려웠던 생각이 많이 듭니다. ▶ 올해 나이는 어떻게 되시나요? 마흔 넷입니다. ▶ 특별히 기부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제가 가난한 환경에서 어렵게 공부를 해오면서 제가 힘들 때마다 나중에 꼭 성공해서 나 같은 사람을 도우면서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늘 많이 했었는데요. 지금 우리 학생들 가운데 가끔씩 아르바이트도 많이 하는 친구들을 보면 제 옛날 생각이 떠올라서요. 그래서 도와주는 것이 오히려 제 기쁨이고, 또 이제는 좀 여유가 돼서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옛날의 제 자신과의 약속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 고향은 어디세요? 몇 형제셨나요? 경북 영천입니다. 제가 2남 2녀의 맏이입니다. ▶ 44년 전 경북 영천이면 전기는 들어왔던가요? 그 때는 전기가 없었고요. 저희가 호롱불을 켜고 살다가 한 10살 때 쯤 전기도 들어오고, 버스도 하루에 아침 저녁 한 번씩 들어 왔었습니다. ▶ 처음 버스를 보니까 어떠시던가요? 처음에는 늘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 경운기를 타고 다녔는데, 버스를 보니까 아주 신기하죠. 버스 뒤에 매달려서 많이 다니기도 했죠. ▶ 버스를 타보기는 언제쯤 타보셨어요? 버스를 중학교 때 타긴 했지만 아주 드물게 탔었죠. 영천도 시내는 어느 정도 괜찮은데요. 저희 집은 시내에서 한 10km 정도 떨어진 시골이라서 좀 더 ‘깡촌’이라고 할 수 있죠. ▶ 아버님은 어떤 일을 하셨어요? 저희 아버님은 시골교회 장로님이셨는데요. 물려받은 논이나 땅이 없으니까 남의 논을 경작하셨어요. ▶ 그럼 믿음과는 원래 가까이 생활 하셨겠네요. 네. 어릴 때부터 그런 환경에서 주로 자랐죠. 지금도 복음성가는 자기 전에 늘 들으면서 잡니다. ▶ 어머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시골교회 권사님이셨어요. 저의 아버지는 40대 초반에 장로님이 되셨는데요. 시골교회는 조그마한 교회이다 보니 혼자서 꾸려 나가셨죠. ▶ 그럼 어린 시절에 쌀밥은 배부르게 드셨습니까? 밥을 하면 거의 대부분 보리밥이었죠. 그 보리밥도 못 먹을 때도 있었고, 어쩌다 쌀을 넣으면 조금이라도 흰 부분을 더 먹으려고 했었죠.(웃음) ▶ 그 어린 마음에도 ‘우리집은 왜 이렇게 가난할까?’ 하는 생각은 언제쯤 하셨나요? 너무 많았죠. 몇 가지 예를 든다면요. 학교에서 크레용이나 색종이 등의 준비물을 가져오라고 하면 그것을 못 가져가는 경우가 많아서 혼날 때라든지, 등록금을 제때 못 내서 혼날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고요. 또 주변에는 흑백TV를 가진 집들이 많았는데, 옆집에 가서 눈치보면서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 그럴 때 부모님을 원망해보기도 하셨나요? 저희 아버님이 가난 하셨지만 근면하셨고요. 제가 미국에서 박사학위 받기 직전 쯤에 56세에 돌아가셨는데요. 저한테는 아주 정신적인 힘이 되고, 저의 정신적인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곧고 올바른 분이세요. 그래서 원망을 하거나 그런 것은 없었고요. 너무 갑자기 돌아가셔서 제가 그 때 연락 받고 급히 비행기표를 구해서 오는데 만 하루가 걸렸는데요. 그 때 당시만 해도 장례식을 병원에서 못하고 집에서 했는데, 장남이 안 오니까 입관도 못하고 기다렸었어요. 그 때 너무너무 슬퍼서 하관할 때는 제가 막 땅을 파헤치면서 울어서 제대로 장례식도 못 치렀어요. 저희 아버님은 제가 돼지고기 한 근 사드리지 못하고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원망이라기보다는 너무 아쉽고 그리운 마음 뿐이죠. ▶ 어릴 적 살던 동네에 초등학교는 있었습니까? 예. 걸어서 한 30-4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초등학교가 있었어요. 영천 영도 초등학교 인데요. 물론 지금은 폐교 되고 없지만요. 그 당시 초등학교에 걸어서 다니면서 재미있었던 추억도 많습니다. 지금도 초등학교 동기 모임에는 제가 꼭 참석합니다. ▶ 저는 어릴 때 서리도 많이 한 것 같은데, 한 교수님도 그런 기억이 있으신가요? 저도 서리라는 서리는 다 해봤죠. 감자, 고구마 구워서 먹는 것은 당연하고요. 포도, 복숭아 같은 과일서리부터 배고플 때는 무도 뽑아서 먹고요. 또 소 먹이러 가서는 개구리를 많이 잡아서 구워 먹었어요. 개구리가 맛있었거든요. 또 선배들이 뱀을 잡아다가 구워서 먹기도 했죠. ▶ 그런 것이 장난삼아 한 건가요, 아니면 정말 배고파서 그랬던 건가요? 배가 고파서 먹었던 거죠. ◇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 하며 고학생활. ▶ 중학교는 어떻게 다니셨어요? 중학교는 집에서 10km 정도 떨어진 영천 시내에 있는 영천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 그 때는 자전거가 있으셨나봐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어요. 자전거 타고도 편도 1시간 15분 정도 걸리니까 걸어서는 힘든 거리죠. 다른 사람이 타던 자전거를 얻어서 탔는데,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는 흔들리고 불안하고 체인이 잘 벗겨졌어요. 그래서 지각도 많이 했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길도 좁았는데 사고 한 번 안 일어난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겨울에 눈길, 빙판길은 어떻게 하셨어요? 제가 손, 발이 특히 찬데, 겨울에 자전거만 타면 손, 발이 아주 얼고요. 거의 동상 걸릴 정도였죠. ▶ 그 때 토끼털 귀마개도 많이 하고 다녔는데, 기억나세요? 그것도 여유가 있는 집 아이들이나 좋은 것을 하고 다녔고, 형편없는 귀마개는 별로 따뜻하지도 않았죠. ▶ 그래도 도시락은 싸가지고 다니셨나요? 특별히 보릿고개 때나 몇 번을 제외하고는 도시락을 싸갔었는데, 대체로 반찬이 거의 김치니까요. 흔들리거나 하면 김치 국물이 넘치기도 하고요. 중학교 때 제 옆자리 친구가 시내에 사는 친구여서 달걀 프라이나 좋은 반찬을 가져오는데, 저는 늘 김치만 가져가는 것이 부끄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 도시락을 난로에 올려놓았던 기억도 나는데, 한 교수님도 그런 경험 있으세요? 난로 위에 도시락을 얹지 않으면 굉장히 차갑지 않습니까? 그런데 얹어도 점심시간에 꺼내서 먹으면 부끄러워서 미리 먹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 공부는 어떻게 하셨어요? 공부하는 시간이 많지 않고 맘이 힘들었지만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부는 늘 잘했고요. 특히 수학은 늘 100점을 맞았습니다. ▶ 어릴 때는 어떤 꿈을 가지고 계셨나요? 저는 어릴 때 좀 억울한 사람들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판사가 되는 것이 꿈 이었습니다. ▶ 교과서 이외에도 다른 많은 책을 보셨을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책을 많이 읽었는데요. 시간이 많지 않아서 읽고 싶어도 읽지 못한 경우도 많았는데요. 읽은 책 중에 제 인생에 영향을 미친 책을 꼽자면,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입니다. 성경에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라는 말이 있는데요. 그 책의 주인공인 제롬이 시골의 낡은 교회에서 목사님의 ‘좁은 문’ 말씀에 관한 내용을 인용하는데, 자기가 좀 다른 식으로 사랑에 적용을 한 작품인데요. 저와 같은 내용은 아니지만, 그 때 저는 성경을 보면서 내가 크면 꼭 성공해서 남들이 편한 길로 간다면, 나는 남들이 가지 않는 ‘좁은 길’로 가겠다는 생각을 성경과 그 책을 보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영천에는 언제까지 사셨나요? 중학교 때까지는 영천에 있다가, 고등학교 때 영천에서 나와서 자취를 시작했죠. ▶ 그런데 고등학교를 ‘공고’를 선택하신 이유가 어떤 것인가요? 다른 이유보다도 가정형편이 어려웠으니까 등록금 문제가 가장 컸는데요. 그 당시에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그런 특수학교에 많이 들어갔습니다. 또 기숙사를 제공해 준다고 해서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것이 가장 큰 이유였죠. ▶ 학교를 다니면서 수세미를 팔러 다니기도 했다고 하던데요. 사실 부모님께 의지할 형편이 아니었고요. 또 고등학교 기숙사를 짓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사정상 안 지어지고 해서 생활비를 벌 수 밖에 없었죠. 수세미 같은 경우 제가 아이디어를 낸 것이 있는데요. 밤에 집집마다 담장 너머로 이것을 던져 놓으려고 하니까 깨지지도 않아야 하고 소리도 나지 않으면서 집집마다 필요한 것이 뭘까 생각을 해보니까 수세미 더라고요. 학생이 판다는 내용의 쪽지를 수세미와 같이 해서 저녁 때 쭉 집어 던져놓고, 다음 날 아침 일찍 거두러 다니면서 돈도 받고 했죠. 그런데 그냥 돌려주시는 분들이 대부분 이었고요. 어떤 분들은 잘못 던져져서 받은 적도 없는데 무슨 이야기 하냐고 하는 경우도 있고요. 또 일부 어떤 분들은 팔아주시면서 좋은 말도 해주셔서 작은 도움이 큰 힘이 되었었죠. 정말 힘들 때는 말 한 마디 없이 어깨만 두들겨 주어도 눈물이 나거든요. ▶ 한 교수님한테 그런 고생이 준 가치는 어떤 것이었나요? 그 때 제가 꼭 성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힘들더라도 주변의 작은 도움을 통해서 격려를 받으면서 제가 희망의 끈을 평생 붙들고 가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평생 제가 아무리 성공하고 잘 되더라도 지금 이 순간 고생하던 시절을 잊지 않아야겠다는 것을 그 때 늘 다짐의 다짐을 했었죠. ▶ 그래서 잠을 아끼느라고 고 3때는 누워서 자본 적이 없으시다고요? 네. 저희들이 국립이고 특수 공고이다 보니까 대부분이 실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진학공부를 할 시간이 없었죠. 또 아르바이트를 하니까 전혀 공부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죠. 고 3때 진학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니까 시간은 너무 없고, 잠을 줄이는 방법 밖에는 없더라고요. 그런데 누워서 자버리면 못 일어나니까 공부 하다가 엎어져서 자곤 했죠. 어떤 때는 누워서 잔 적이 없는데 아침에 일어나서는 누워 있는 것을 알고는 너무나 제 자신에 화나고 했던 적도 많았었죠. ▶ 공고를 졸업하고는 취직을 안 하시고, 대학을 가신 거죠? 대부분의 친구들은 다 취업을 했는데요. 저 같은 경우는 왠지 취업을 하면 희망이 안 보일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진학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요. 저희 부모님은 마음으로는 지원해주셨고 못 도와주시는 것을 오히려 미안해 하셨는데요. 오히려 주변의 동네 분들이나 친척분들이 “너희 형편에 무슨 대학이냐?” 하는 질책도 많이 받았지만, 희망의 끈은 들고 있어야겠다고 해서 진학을 하겠다는 각오가 있었죠. ◇ 시체 닦는 아르바이트하며 공부... 힘들었던 미국 유학생활. ▶ 그럼 어느 고등학교에서 어느 대학교로 진학하신 건가요? 국립 경북기계공고를 졸업하고 영남대학교 기계과에 들어갔죠. 물론 서울대학교를 가고 싶어서 재수할 생각도 있었는데, 재수하려니까 또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재수를 못하고 바로 진학을 했죠. ▶ 등록금은 어떻게 하셨어요? 고생을 많이 했죠. 대학 다닐 때는 아르바이트라는 아르바이트는 다 한 것 같습니다. 과외, 군밤장수, 식당 서빙 등 온갖 일은 다 해봤습니다. ▶ 어떤 일이 제일 서럽고 힘들던가요? 여러 가지 다 즐거웠던 것은 아니었는데요. 제가 겨울이면 꼭 감귤 장사를 했는데, 그 당시 새벽 다섯 시에 가게에 나가야만 좋은 물건을 받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일찍 가서 물건을 받아다가 자취방에 가져다 놓고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고 와서 오후 늦게 리어커 끌고 다니면서 팔기도 하고, 길거리에 세워놓고 팔기도 했었죠. ▶ 뵙기에는 수줍고 소극적이실 것 같아서 장사와는 영 맞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처음에는 잘 못했죠. 그래서 일단 좋은 감귤을 부지런하게 가지고 왔고, 많이 담아드렸어요. 그러니까 기존에 전문적으로 하시는 분들 보다도 오히려 제가 더 많이 팔았죠. ▶ 군대 다녀와서 연세대 대학원을 마치고 유학까지 다녀오셨어요.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네. 저는 고생을 쭉 해와서 그런지 고생하는 것 자체가 두렵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부딪치면 다 해결되겠지 하는 생각을 했고, 제가 가지고 있는 믿음도 있었고요. 그래서 한 학기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들고 미국에 가서는 너무나 고생을 많이 했는데요. 거기서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을 타기도 했지만,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국에서는 유학생 신분으로는 아르바이트 제약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미국은 사람이 죽으면 장기나 신체를 기증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장기를 기증하게 되면 대학 해부학 교실에서 관리를 하면서 의대생들이 실습을 할 수 있도록 제가 아르바이트로 기증된 사체를 닦고 화학약품 처리도 하고, 때로는 장기나 부위별로 나누기도 했는데요. 그 때는 너무너무 힘들어서 자다가 놀래서 벌떡벌떡 일어난 적도 있었는데요. 지금은 또 제가 그것 때문에 아직까지 고기를 잘 못 먹습니다. 그렇게 미국에 있을 때는 너무나 절망적이고 사방이 다 막혀서 길이 안 보이는 그런 상황도 있었지만, 제가 죽었으면 죽었지 그 희망의 끈을 붙들고 버텼죠. ▶ 23억을 어려운 학생들에게 기부를 하신다고 하셨는데요.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 건가요? 제가 여유가 되는 범위 내에서는 저같은 학생들을 도와오고 있었고, 제 흉내를 낸다고 유학 가있는 친구도 있습니다. 또 저희 학생들 중에서 몰래 주기도 하다가, 좀 더 체계적으로 해야겠다 했는데, 제 연구들의 성과도 나오고 그 수익금이 좀 생겨서 현재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매년 1억씩 하기로 했습니다. 올해 1억을 기부했고, 내년, 후년 계속해서 최소한 그 정도는 제가 할 수 있기 때문에 약정을 하게 되었는데요. 저도 많이 고생을 했지만 다시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면 더 많이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성경에 보면 ‘축복의 통로’라는 말이 있는데요. 향후에는 더 열심히 살고 더 많이 얻어서 제가 축복의 통로가 되도록 계속 노력할 겁니다. ▶ ‘23억’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뭔가요? 제가 매년 1억씩을 하게 되면 만65세 교수 정년 때까지 하는 것이 일단 상징적인 것이고요. 물론 정년이 끝나도 당연히 계속 해야겠죠. 그리고 지금 그 숫자는 제가 할 수 있는 능력내의 범위이고, 향후에는 제가 훨씬 더 할 수 있을 것으로 아마 제가 그런 축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됩니다.(웃음) ◇ 열정과 믿음으로 희망을 끈을 놓지 않는다면 반드시 길이 열립니다. ▶ 어떤 돈으로 하겠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는데요. 의료공학과 교수이신데, 의료기기 특허로 인한 수익금이 있습니까? 의료공학이라고 하면 CT나 MRI 같은 장비를 개발하는 분야입니다. 저희가 개발하는 것 중에 중풍, 치매, 뇌출혈, 뇌경색을 예방하는 진단 검사하는 기술이 있는데요. 그런 쪽의 기술들을 통해서 수익이 생겨나고, 이것이 상품화 되어서 전국적으로 전세계적으로 많이 보급이 될 것입니다. 사실 저희 아버님이 뇌출혈로 돌아가셨는데요. 우리나라가 뇌졸중 사망률이 OECD 국가 중에서 헝가리 다음으로 2위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병을 전세계적으로 퇴치를 해야겠다는 각오를 하게 되었죠. 아직 뇌질환을 저렴하게 검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자기 뇌의 혈관에 이런 뇌출혈이 올지 여부를 진단해 본 분들이 별로 없거든요. 제가 모든 병원에 이것을 저렴하게 다 판매할 수 있도록 그 기술을 개발해서 보급을 하게 됩니다. ▶ 미래에 대한 계획이다보니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경우도 생길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제가 건강이 안 받쳐 주어서 일을 못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런 경우가 없고요. 제가 우스운 표현으로 “수류탄에 왜들 놀랠까? 핵폭탄도 남아 있는데...” 하는 말을 하는데요. 이것은 제가 확보된 부분에 대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앞으로 지켜보시면 더 놀라실 일들이 많을 겁니다. ▶ 그런데 아직까지 집이 없으시다고요? 자제분은 어떻게 됩니까? 아들 둘입니다. ▶ 그래도 네 식구가 함께 살 내 집이 없다는 것이 좀 아쉬운데요. 예전에는 제가 소유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요. 요즘은 집을 하나 마련해야겠다 생각해서 준비를 할 겁니다. 저의 아내도 더 좋아합니다. 제가 이번에 1억짜리 수표를 내고 나니까 돈이 없어서 다음 날 저의 아내에게 삼만원만 빌려달라고 하니까 이런 모습이 더 존경스럽다고 합니다. 오히려 친척분들은 걱정하시는 분들이 있으시지만 저희 가족들은 저희 어머니도 그렇고 동생들도 그렇고 다 좋아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세요. ▶ 주변에 보면 나눔과 봉사에 대해 생각들은 많이 하시는데,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은데요. 보통 연말에 잠깐하는 경우가 많고, 기부하면 보통 큰 기업이나 성공한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어쩌면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서 하는 것으로 알고 계시는데요. 제가 역경을 딛고 살아오면서 정말 힘들 때 작은 도움들이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주위에 나보다 조금 더 어려운 사람에게 오천원, 만원이라도 도와주면 그 사람들은 아주 큰 힘을 얻는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모든 분들이 자기보다 조금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정말 아무것도 없다면 마음으로라도 말 한마디라도 북돋아주고 격려해준다면 그것이 기부가 아닐까 싶고요. 이런 것들이 다 합쳐져서 이런 사랑을 나눌 때 사회가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주변에 정말 형편이 어려운 안타까운 제자들에 대한 얘기도 해주신다면요. 지금도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물론 학자금 대출 등이 있기는 하지만 미국 등에 비하면 아직 많이 부족하죠. 최소한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특히 중, 고등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교에 다닐 때도 공부만 실컷 전념해서 하면 성공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분들이 장학재단을 만들고 기업재단에서 나서서 정말 우리 사회가 학업에 뜻이 있는 사람에게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힘들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저는 ‘열정’이라는 단어와 ‘믿음’이라는 단어를 제일 좋아하는데요. 어려운 학생들을 보면 정말 사방이 다 막혀도 희망의 끈을 붙들고 열정을 가지고 된다는 강한 의지만 갖고 있다면 길이 열린다고 봅니다. 저도 다 막혀서 길이 안 보였을 때도 정말 열심히 그런 마음으로 사니까 길이 열리고 더 좋은 길이 나타났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 있든지 조금 더 그런 열정으로 최선을 다한다면 지금은 앞이 안보여도 미래에 좋은 길들이 다 열릴 겁니다.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